함께 & 연대2013. 12. 16. 18:33


페이스북을 통해 주어모은(?) '안녕하십니까' 대자보에 대한 분석 모음.

나의 단상은 좀더 생각 정리 후에. 



한형식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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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흐름을 누가 어디로 이끌고 갈 수 있다고 보지도 않고 그것이 바람직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앞으로의 방향은 그 큰 흐름 속에 들어간 이들이 각자 판단해 결정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순수성 운운하며 기존의 운동단체나 정파들이 손놓고 보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도 공허한 소리다. 기존 사회에 분노하는 대중들이 이렇게 모였는데 그것을 그냥 두고 보는 것은 운동가들의 책임 방기다. 당장 오늘도 진보논객을 자처하는 이들이 섣불리 개입하지 말고 그냥 호응하고 지지하라는 말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능동적이고 구체적인 대안 없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사실은 자율적인 대중이라는 환상에 근거해 이 운동을 탈정치화하는 효과만을 가져 올 것이다. 대중을 대상으로 자신의 주장을 선전하고 조직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바이다.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스스로 조직하지 않고 남이 차린 밥상에 숟가락만 얹으려는 운동방식이 너무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자기 몸은 꼼짝 않고 가르치기만 하는 전문 훈수꾼들까지도 자신들의 행태를 운동이라고 부른다. 지난 20여 년 동안 NL출신들은 기층에서 조직‘만’ 하고 PD 출신들은 민중 누구도 그들에게 요청하지 않았던 이론 연구와 지도 역할을 자임했다고 해도 지나친 단순화가 아니다. 이론적 지도만을 자임하는 단체가 아직도 있고 현장의 활동가보다 운동평론가들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안녕들 하십니까?”의 열기도 언젠가는 시들해질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이 열기를 지속시켜 발전시킬 것인가를 바깥에서 고민하고 가르치려 들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또 자꾸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하는 무책임한 태도도 경계해야 한다. “안녕들 하십니까?”의 앞으로의 진로가 걱정된다면 운동진영은 스스로 이렇게 모인 대중들을 위해 무엇을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안녕들 하신지를 묻고 대답했던 이들이 자신들이 안녕하지 못한 이유를 더 자세히 알고 싶을 때 그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는 모임과 프로그램, 힘들고 지쳤을 때 함께 위로받고 기운을 얻을 수 있는 친밀한 인간 관계, 생각만으로 풀리지 않는 문제를 고민할 때 도움을 줄 책, 거친 세상으로 나갈 때 함께 진로를 준비하며 도움을 줄 친구와 선배들, 사회에 나가서는 기존 체제에 편입되지 않고 버틸 수 있게 서로 묶어주는 모임, 다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싶을 때 그 목소리를 전해줄 매체, 이 추운 겨울에 찬바람 부는 길거리에서만 머물러야 할 이들이 머물고 함께 의논하고 일 할 수 있는 공간, 무엇보다도 대자보를 부칠 장소조차 없는 소속된 곳 없는 이들을 받아 줄 직장, 학교, 단체 등을 만들어야 한다. 쉽지 않고 오래 걸리는 일이겠지만 지금의 이 열기가 지속되고 나름의 방식으로 발전하기를 진짜 원한다면 운동하는 이들은 이런 것들을 준비해야 한다. 



조희연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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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작은 대자보가 반향을 일으킨 것은 그것이 현재의 척박한 현실에 대한 '반성적 물음'의 형태로 문제제기를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기존의 계몽적 형식 보다는, 물음을 제기하는 방식 자체가 공감의 폭을 넓혔을 것 같다.


2. 다음으로 대자보의 반성적 물음에는 한편에서 척박한 현실에 대한 비판적 물음이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 현실을 대하는 젊은 세대의 탈정치화된 태도에 대한 비판적 물임이 있다. 먼저 척박한 현실에 대한 비판적 물음이 있다. 구체적으로, 박근혜정부의 1년 동안의 정책에 대한 비판적 물음이다. 우리 모두의 의아심을 자아낼 정도로, 국정원 사태에 대한 박근혜정부의 철저한 외면, 전교조 불법화, 밀양사태 등 박근혜정부의 강경일변도의 정책,경제민주화정책이나 복지정책의 후퇴, 그런 기조 위에서 젊은 세대가 직면하는 척박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물음이다. 대자본 현상과 그에 대한 공감 확산에는 척박한 현실에 대한 비판적 물음에 대한 공감이 내재하고 있다. 


3. 다음으로, 대자보 공감에는 가혹한 한국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현실, 국민의 기대에 한참 못미치는 박근혜정부 하의 정치현실에 대한 잠재적 불만 뿐만 아니라, 그러한 현실에 대한 순응, 침묵, 체념으로 응대했던 젊은 세대의 태도에 대한 자성적 비판에 대한 공감이 존재한다. 이 대자보 현상에는 젊은세대의 또다른 척박한 태도에 대한 비판적 물음이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대자보는 한국사회에서 오래된 항의의 형식이다. 이 대자보도 고색창연한 오래된 형식으로 붙여졌다. 그런데 그것이 SNS라는 새로운 소통의 통로를 타고 확산됨으로써 고대를 넘어 여러 대학과 사회에 공감을 자아내고 심지어 오프라인 모임으로까지 확산되게 되었다. 물론 '응답하라 1994' 처럼 어떤 복고적 경향도 한 몫하는 지도 모르겠다. 어쨋든 이번 대자본 현상은, 오래된 형식과 새로운 감수성이 결합하는 좋은 현대적 항의행동의 좋은 예가 아닐까 싶다.



이준석 


사실 여러 분석을 살펴보면서 이쯤에서 학생들의 투쟁이 추가동력을 받고, 첨예화하려면 누군가가 탁 박차고 나서면서 "우리들이 안녕하지 못한 이유는 철도 민영화와는 별개의 문제이고, 여러가지 청년의 삶을 힘들게 하는 주제에 대해서 정부가 명쾌한 답을 마련하지 못하거나, 그런 노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선을 그어 버리면 재미있는 상황이 되어 버리는데. 그게 말처럼 쉽나 어디. 


뭔가 만져지는 "철도민영화"라는 주제와 추상적인 "청년의 삶"이라는 주제를 놓고 사실 하고 싶은 얘기는 전자가 아닌데, 전자를 내려놓기 어려운 고민의 지점에 봉착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겟지만, 알고 있다면 다음 동력을 고민하고 있을 그들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김민수


1. 안녕들하십니까와 관련한 여러가지 움직임과 분석들이 있지만 귀찮아서 살펴보지 않았다. 내가 느끼는 '안녕' 대자보의 가장 큰 힘은 메시지 전달 방식에 있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안부를 묻는, 정답을 강요하지 않는, 이 편안한 어조 속에서도 사회문제를 직시하는 메시지에 힘이 실렸다고 본다. 규탄과 분쇄, 해체 등이 난무하는 기성운동의 메시지와의 차별성이 분명하다. 


2. 어찌되었든 대중은 이 차별성에 반응했다. 먹고사느라 바빠서 스포츠 기사 정도만 살펴보던 사람들이 '철도민영화'를 검색했고 그 중의 일부는 집회에 나갔다. 예상 된 상황은 아닐지라도, 우리 사회의 운동은 한뼘 더 확장 되었다. 


3. 이 상황은 얻어걸린거다. 대자보를 쓰느라 소비한 글쓴이의 먹먹함, 약간의 잉크와 종이 정도만 투입 된 것에 비추어보면 '안녕'은 참으로 가격대비 성능비가 위대한 사업이었다. 


4. 이 얻어걸린 상황에 과도하게 반응하면 촌스러워진다. 이 흘러가는 힘을 어떻게 조직적으로 결집시킬 것인가 등의 고민이 그러하다. 촛불 때가 그랬다. 촛불이라는 예기치 못한, 얻어걸린 상황에서 기성조직들의 과도한 반응이 나왔고, 내 기억에는 결과가 별로 좋지 않았다. 일베의 탄생은 이 촌스러운 과도함과 무관하지 않다. 


5. 따라서 기성 조직이 해야할 고민은 '안녕 대중을 어떻게 조직할까'가 아니라 '왜 우리의 언어에는 대중이 반응하지 않을까'일 것이다. 


6, 기성조직이 '안녕'을 통해 새로운 배움을 얻고, 새로운 내용과 메시지로 대중과 접점을 만들어나간다면, 결과적으로는 더 많은 '안녕'을 보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정치와 사회 의제에 관심을 갖는 대중의 규모가 늘어남을 의미하며, 결과적으로 운동권 시장의 파이가 커짐을 의미한다. 


7. 앞서도 언급했지만 '정답을 강요하지 않음'에 대중과 만나는 핵심 실마리가 담겨 있다. 정답을 강요하는 것이 당장의 조직화 카운팅에는 유익할지라도, 그 반작용도 만만치 않다. 대자보를 찢고 인증샷을 올리는 익명의 유저들을 보며 새삼 안타까워지는 밤이다



Posted by 생숭이